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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世 이담(李湛)

중종 5년(1510) ~ 선조 8년(1575). 조선 문신, 학자, 서화가, 호당(湖堂)출신. 자는 중구(仲久), 호는 정존재(靜存齋), 행검(行儉)의 증손, 적(績)의 손(孫), 종유(宗蕤)의 아들. 12세때 부친을 여읜 그는 편모슬하에서 학문에 전념하였고 한훤당 김굉필 문하에 들었다. 경재(敬齋) 경세인(慶世仁)의 딸과 결혼한 뒤 장인을 사사(師事)하고 천문, 지리, 복술, 활쏘기, 서화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재능을 익히고 계발하였다.

 

중종 33년(1538)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한 뒤 사간원 정언(正言), 홍문관 수찬(修撰), 사헌부 지평(持平) 등을 역임하고 명종 즉위년(1545)에 서장관(書壯官)으로 중국의 연경에 다녀왔다. 이때 중국의 학자들은 그의 인물됨에 감탄하였다. 이담은 비록 대신이라 할지라도 비행이 들어나면 낱낱이 상소하거나 논박하였다. 그가 정언으로 있을 때 재상으로 있던 이기(李芑)의 비행을 논박하여 물의를 일으킨 바도 있었다.

 

그런데 그가 을사사화때 관직을 삭탈당하게 되는데 이것은 지난날 자신의 비행을 논박했던 이기의 보복을 받았던 때문이다. 이기는 그가 관직만 삭탈되고 귀양보내지지 않은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중종 2년(1547) 소위 양재역벽서(良才驛壁書) 사건에 연루시켜 무고한 다음 끝내는 양산으로 유배시켰다.

 

명종 20년(1565), 18년만에 옛 관직을 되찾은 그는 이듬해 사복시검정(寺僕寺檢正)을 거쳐 사성(司成)을 지냈으며, 선조 즉위와 함께 홍문관 부응교(副應敎)로 천거되었다. 부응교로 있으면서 그는 수시로 임금에게 나아가 유학을 장려하여 선정을 베풀어 줄 것을 간언하는가 하면 사화로 말미암아 침체된 선비들의 사기를 붇돋아 주어야 된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그후 선조 임금은 이담의 말을 옳게 받아들여 조광조에게 문정공(文正公)이란 시호(諡號)를 내려주는 한편 선비들을 예우하였다.

 

이담은 제술관(製述官)으로 임명된 다음 명종실록(明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명종 22년(1567) 홍문관 전한(典翰)으로 등용되었고 이후 사간원 사간(司諫), 승지(承旨)를 거쳐 선조 7년(1574)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제수되었다.

 

성리학자(性理學者)로 이황(李滉)을 사숙하였고 저서로 독서연주(讀書鉛朱), 정존수필(靜尊隨筆), 정존재집(靜存齋集)을 남겼으며 선조 8년(1575) 65세를 일기로 타계하니 선조는 각신(閣臣) 노수신(盧守愼), 유희춘(柳希春) 등을 보내어 조문하고 관곽과 장재를 하사하였다. 졸하신후 예산군 덕산면 회암서원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