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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世 이정민(李貞敏)

호는 옥계(玉溪), 홍산현감(鴻山縣監) 향성(享成)의 아들. 향성은 환중(患中)의 모친에게 손을 베어 피를 바친 효자이고 위선(爲先)의 예와 손에게 대할 때 정성이 지극한 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사암 박순(思菴 朴淳), 송강 정철(松江 鄭徹), 우계 성혼(牛溪 成渾) 등과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고 송강이 유배되었을 때에는 공(公) 혼자만이 자주 찾아 문안하였다고 한다.

 

자손되는 공도 천성(天性)이 수미(秀美)하고 효우(孝友)하였다. 박지화(朴枝華), 율곡(栗谷) 등에게 사사(師事)했고, 한때 사우(士友)들의 많은 칭찬도 받았다. 35세에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한 후 1596년 이몽학(李蒙鶴)의 난(亂)이 나자 창의병(倡義兵)을 모집, 홍주목사(洪州牧使) 홍가신(洪可臣)을 도와 이를 평정하여 정난원종공신(靖難原從功臣)에 올랐다.

 

당진현감(唐津縣監)을 끝으로 벼슬을 떠났는데 그 까닭은 공이 거처했던 세심대(洗心臺)는 경치가 장안의 갑지(甲地)로 알려졌는데 광해(光海)가 이를 뺏고 대신 벼슬을 주려하자 공은 이를 피해 홍주의 봉수산하(鳳峀山下)에 은거하다가 만년에야 집을 짓고 옥계자(玉溪子)라 자호(自號)하였다. 그곳에서 학문을 닦으며, 한편 일기를 적었는데 주로 시사를 쓰면서 아무 두려움없이 사실대로를 솔직히 적었으므로 사람들이 보고 춘추필법(春秋筆法)이라 말했다고 하는데 바로 옥계파안록(玉溪破顔錄)이 그 저서이다. 묘는 용인시 수지구 신봉동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