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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世 이일(李鎰)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자는 중경(重卿)이다. 관찰사 이백지(李伯持)의 7대손으로 중종 33년(1538) 용인시 포곡면 신원리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성품이 뛰어나고 어려서부터 힘이 장사였던 이일은 명종 13년(1558)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경성판관을 거쳐 선조 16년(1583) 전라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가 되었다. 이당시 함경도는 북쪽의 오랑캐 즉 번호의 침입이 빈번하였다. 번호의 니탕개(尼湯介)가 북쪽 국경을 침입하여 경원부(慶源府)를 함락시키고 종성(鍾城)까지 포위하고 있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일로 하여금 경원부사로 임명하여 니탕개를 격퇴케 하였다. 1587년 니탕개가 2만여명의 병사를 이끌고 재차 침입을 하자 함경도북병사가 되어 뛰어난 용맹과 지략으로 니탕개의 군사를 모두 쳐부수고 그들의 부락과 소굴까지 불질러 완전히 섬멸하는 큰 공을 세웠다.

 

1588년 두만강을 건너 녹둔도(鹿屯島)에 침입한 여진족의 시전부락(時錢部落)을 소탕하여 가옥 200여동을 불사르고 여진족 380여명을 목 베는 전과를 올렸다. 이후 이일은 김종서가 편찬한 [제승방략(制勝方略)]을 증보하여 적과 싸울 때 필요한 모든 방책과 병사들을 통솔하는 분군법(分軍法), 군무금령(軍務禁令) 수십여조 등의 내용을 담은 [승전방략(勝戰方略)]을 지어 장수들로 하여금 시강(試講)의 표본으로 사용케 하였다.

 

1589년 전라병사로 임명되어 신립(申砬), 정언신(鄭彦信) 등과 변방의 군비상황을 논의하였다. 선조 25년(1592)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신립장군을 도순변사(都巡邊使)로 이일장군을 경상도순변사로 임명하여 방어케 하였으나, 북상하는 왜적을 경상도 상주에서 맞아 싸우다가 크게 패배하고 충주로 후퇴하였다. 충주에서 신립의 진영에 들어가 재차 왜적과 싸웠으나 수만에 조총까지 보유한 왜구에게 패하여 사잇길로 도망하여 황해도로 피신하였다. 이때 신립은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싸우다 전사하였다. 조정에서는 패주한 죄가 크다 하여 처벌을 주장하는 신하가 있었으나 경험이 많은 무장이라 용서하였다. 이후 선조의 근위대장(近衛隊將)이 되어 임진강에서 왜군 500여명을 베어 그들의 기세를 꺾은 바 있으며, 세자 광해군을 3,000여명의 군사로 호위하다가 평양 왕성탄(王城灘) 전투에서 왜적 80여명을 사로잡기도 하였다. 이후 동변방어사(東邊防禦使)가 되어 평양을 방어하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수만 병력을 이끌고 원정해 오자 이일은 평안도 절도사로 이들과 합세하여 왜적을 공격한 결과 평양을 회복하였다. 이에 선조는 공을 극찬하며 백금 20냥을 내려 주었다. 그 뒤 지중추부사·비변사당상·훈련원지사를 지내면서 군사를 조련시켰으며 한양이 탈환되자 우변포도대장이 되어 수도치안유지에 힘썼으며 충청도에서 송유진(宋儒眞)의 난이 일어나자 순변사로 그 뒷수습을 맡아 처리했다. 1595년 왕의 특지로 다시 함경도 순변사, 충청·전라·경상도 삼도 순변사를 거쳐 무용대장(武勇大將)이 되었다.

 

선조 34년(1601) 함경남도 병마절도사로 재직중 부하를 죽였다는 살인죄의 혐의를 받고 붙잡혀 호송되다가 정평(定平)에서 병으로 죽으니 이때 나이 64세였다. 선조는 이일장군의 공로를 생각하고 애도의 뜻을 표하며 관직을 좌참찬으로 추증하고 시호를 장양공(壯襄公)이라 하였다. 저서로는 [증보제승방략] 2권과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가 전해오고 있다. 그의 묘소는 용인시 모현면 매산리 고시능에 있으며 신도비는 영의정 도곡 이의현이 썼다.

 

<壯襄公征討時錢部胡圖 - 小塘 李在寬 作, 육군박물관 소장>

 

<壯襄公 필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