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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世 이후산(李後山)

선조 30년(1597) ~ 숙종 1년(1675)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자고(子高), 호는 설파(雪坡). 병조정랑 신충(藎忠)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계인(啓仁)이고, 아버지는 대사간 사경(士慶)이며, 어머니는 성희익(成希益)의 딸이다.

 

광해군 8년(1616) 진사시에 합격, 성균관의 유생이 되고, 참봉·의금부도사·세마·익위 등을 거쳐 부여현감·지평·정언·장령 등을 지냈다.

 

인조 16년(1638)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지·황해도관찰사·충청도관찰사 등을 지내고, 1663년 진위 겸 진향부사(陳慰兼進香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나 사행중에 뇌물을 받았다는 죄로 파직되었다.

 

뒤에 복직되었으나 1668년 병조참의로 군사(軍士)를 고립(雇立 : 댓가를 치르고 군역이나 부역을 대신 시킴)할 때 부정이 있어서 다시 파직되었다가, 1672년 한성부우윤으로 승진되었다. 그간 황해·충청·강원도의 관찰사와 청풍군수·판결사 등을 거쳐, 1674년 개성부유수에서 기로소당상관(耆老所堂上官)이 되고, 그 뒤 형조참판에 이르렀다.

 

부여(扶餘)에 있을 때 변방의 경보(警報)가 갑자기 이르러 나라 안이 소란하였으나 공은 혼자 그전처럼 일을 처리하며 얼음을 저장하는 일까지 빠뜨리지 않았으므로, 이듬해 여름 이웃 경내에서 상(喪)을 당하거나 제사를 지내는 자들이 모두 거기에 힘입었다. 이때에 이르러 갑자기 적이 침입했다고 와전(訛傳)되어 경사(京師) 역시 크게 놀라게 되었는데, 공은 하령(下令)하기를, “감히 변동(變動)하는 자가 있으면 참(斬)하겠다.”라고 하여, 부중(府中)이 마침내 안온하였으니, 이때는 현종(顯宗)이 막 승하한 날이었다. 이에 공은 말하기를, “물러날 나이가 되었는데도 물러나지 않으면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임금이 새로 즉위하였으니 한번 사은(謝恩)한 연후에 내 뜻대로 해야겠다.”라고 하였다.

 

성색(聲色)과 분화(紛華)에 대해 보기를 자신을 더럽힐 것처럼 여겼다. 손님이 오거나 사무(事務)가 없으면 반드시 조용히 앉아서 책을 보았는데, 그 모습이 엄중한 가운데 온화하였고 행동에 법도가 있어 사람들이 친애하면서도 감히 함부로 대하지 못하였다. 두 번이나 연경(燕京)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나 행탁(行槖)에 1전(錢)의 돈도 없었다. 대부인(大夫人)을 섬기면서 성경(誠敬)을 갖추기를 다하였으며 상(喪)을 당해서는 슬픔을 다하였다. 50세의 나이에 비록 매우 추운 겨울일지라도 제사 때는 반드시 목욕 재계(沐浴齋戒)하였으며, 백씨(伯氏)와는 날마다 서로 만났다.

 

관부(官府)의 일을 함에 있어 항상 명성(名聲)이 알려졌으며, 은미(隱微)한 일을 잘 적발하는 사람을 매우 미워하고 항상 인륜(人倫)을 애호하였으므로 완악(頑惡)하게 지내다가 교화된 자가 있었다. 아무리 급할 때 라도 말을 빨리 하거나 갑자기 안색을 변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항상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 어진 마음과 덕을 보였다. 벼슬한 50년 동안 항상 드러나게 등용되기도 하고 버려지는 때도 있어서 사람들이 공을 위해 승진이 지체되었다는 한탄이 있었으나 공은 유연(悠然)히 마음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스스로 돌아보아도 끝내 부끄러운 기색이 없었으니, 어질다고 할 수 있겠다.

 

판서(判書) 김수현(金壽賢)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김씨는 대족(大族)인데다가 또 여서(女婿)가 많았는데, 모두 공과 취향(趣向)이 달랐다. 공은 그 사이에 끼어 장중한 풍채로 끝내 조금도 눌리지 않으니, 사람들이 그 때문에 공이 수립(樹立)한 바가 있는 줄을 알았다. 김씨 부인은 사서(史書)를 대략 섭렵하여 학식과 도량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출가하기 전이나 출가한 후의 행실이 모두 본받을 만하였다. 공이 귀(貴)하게 되기 전에 집이 매우 가난하였으나 부인은 항상 기쁜 모습을 보였으니, 이 때문에 육친(六親)이 항상 칭송하였다.

 

아들 이순악(李舜岳)과 이선악(李宣岳)은 모두 음사(蔭仕)하고 이두악(李斗岳)은 진사(進士)이다. 큰딸은 윤우정(尹遇丁)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이하진(李夏鎭)에게 시집갔는데 같은 이씨가 아니며, 다음은 서문중(徐文重)에게 시집가고 다음은 박선(朴銑)에게 시집갔는데 모두 관인(官人)으로 윤우정과 이하진이 가장 현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