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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世 이중인(李中仁)

 

고려 말기의 문신. 두문동(杜門洞) 72현중의 1인. 태사삼한벽상공신(太師三韓壁上功臣) 이길권(李吉卷)의 후손. 시호는 충숙(忠肅)

 

충숙왕 2년(1315) 개성의 일청재(一淸齋)에서 부친 광시(光時)와 부부인(府夫人) 기씨(奇氏)사이에서 출생하였다. 당시 명망이 높았던 이백겸(李伯謙)이 그를 보고 말하기를 “중인(中仁)의 흉중에는 진초(秦楚)의 위엄이 숨어있다”라고 하였음으로 그의 호를 “진초”라 하였다.

 

일찍이 큰 포부를 안고 학문에 정진하는 한편 덕량(德量)을 길러 일대종장(一代宗匠 : 경서에 능하고 글을 잘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 되어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어려서부터 그의 문하(門下)에서 글을 배웠으며 당시에 팔현(八賢)이라 일컫던 이조년(李兆年), 이숭인(李崇仁), 김주(金澍), 이양중(李養中) 등과 더불어 스승이 되고 벗이 되는 등 교분이 두터웠다.

 

관위는 통덕랑홍복도감판관(通德郞弘福都監判官)에 이르렀을 때 여말에 정치가 혼란한 것을 보고 개탄한 나머지 관직을 떠나 은거하였다. 이때 이태조(李太祖)가 조선을 건국하고 그의 충절을 흠모한 나머지 추성병의 동덕찬화보리공신벽상삼한삼중대광구성부원군(推誠秉義同德贊化輔理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駒城府院君)을 봉하고 나라를 위하는 정성과 두 마음을 먹지않는 의리(義理)를 겸하였음을 중히 여겨 “나를 도와 서신(庶臣)을 이끌어 달라”고 당부하였으나 “나는 전조(前朝)의 사람인지라 받아 들일 수 없다”하고 말하기를 “고요하고 소박한 결심(自靖素志)이 어찌 변하리요”하고 드디어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종신토록 나오지 않았다. 그때 사람들이 그를 칭송하여 이르기를

           적적한 두문동에 외로운 충의는

           해와 별보다 더 빛나리라.

           봉군(封君)을 사향함은 도리어 작은 일이며

           세상에 떨친 명성은 천추에 빛나리라.

            (寂寂杜門洞 孤忠炳日星 讓封猶細節 千載樹風聲)

라고 하였다.

그가 하세하자 묘는 기흥구 영덕동 자은교(慈恩橋)에 자리잡고 있으며, 그의 향사를 받드는 구성재(駒城齋)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