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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世 이재관(李在寬)

정조 7년(1783) ~ 헌종 3년(1837). 자는 원강(元綱), 호는 소당(小塘). 조선 후기 화원(畵員)으로 벼슬은 감목관(監牧官)을 지냈다.

 

1836년 영흥부(永興府) 선원전(璿源殿)에 봉안되었던 태조(太祖)의 어진(御眞)이 도적에게 훼손되었으므로 이듬해인 1837년 경희궁(慶熙宮)에서 모사 복원한 공으로 등산첨사(登山僉使)가 되었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집안 형편이 어려웠으므로 그림을 팔아 모친을 봉양하였다.

 

우봉(又峯) 조희룡(趙熙龍)이 쓴 호산외기(壺山外記)에 의하면 일찍이 선생으로부터 그림을 배운바는 없으나 스스로 고법(古法)을 터득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또 산수나 인물 등 모든 사상(思像)의 표현이 묘미를 다했으며, 초상의 솜씨는 전후 백년동안에는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평하였다. 또한 그의 영모(翎毛)는 일본 사람들이 좋아하여 동래관(東萊館)으로부터 해마다 구해 갔다고 한다.

 

이재관은 비록 그림을 팔아 생활한 직업 화가였으나 그가 추구한 것은 문인화의 세계였다. 그의 그림들을 보면 소재의 선정이나 그 소재를 처리하는 기법에서 문인화의 세계를 향한 의중이 들어난다고 평가되고 있다.

 

유재건(柳在建)의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 이재관이 문인 화풍의 화가 이유신(李維新)의 조카라고 되어 있으며 그의 작품중에 김정희(金正喜)의 제발이 들어 있고 실제 화풍상으로도 이인상(李麟祥) 윤제홍(尹悌 弘) 등의 화풍과 유관한 면모를 보이고 있어 문인화가를 추구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 송하처사도(松下妻士圖)는 큰 바위 하나를 배경으로 하고 그 앞에 흐르는 계류의 둔덕에 낙락장송을 배치하였는데 의연하게 솟은 소나무의 풍모와 주인공의 청정한 모습이 서로 대칭하여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이러한 소재 자체와 춤추는 듯 굽어진 소나무가지의 모습 등이 18세기 문인화가 능호관 이인상으로부터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음을 말해준다. 다만 이재관의 필법이 이 인상의 깔끔한 그것에 비하여 훨씬 투박하고 문기(文氣)가 미치지 못하는 것이 차이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또한 이재관이 담청을 애용하였다는 점 등은 당시대 화원 윤제홍(尹濟 弘) 일파와도 어느 정도 유관했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필법은 주로 조선후기 풍미하였던 남종화풍의 일종이며 문인화가들이 즐겨 구사했던 풍조와 일맥을 이루고 있어 문인화가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 된다.

 

그는 병으로 고생하면서도 벼슬을 마다하고 집에 돌아와 1837년에 타계하였다. 이때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던 조희룡은 “선비가 때를 만나기란 천년에 한번 있을 정도로 어려운 것인데 어진(태조)을 그려 봉안한지 4백여년 뒤에 다시 고치게 되었으니 이는 그가 이에 부응하여 태어난 것으로 결코 헛되이 태어나지 않았다”고 하였다.

 

  

<총석정도>                                              <송하처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