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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世 이홍망(李弘望)

자(字)는 원로(元老). 호는 호암(虎岩). 첨지중추부사 성달(成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명효(明孝)이고, 아버지는 양진(陽晋)이며, 어머니는 유익(柳益)의 딸이다. 조실부모하여 의탁할 곳이 없어 끼니조차 어려운 중에서도 주야 면학(勉學)에 힘써 심지어는 상투를 대들보에 묶어 놓고 잠을 물리치기까지 하였다한다.

 

선조(宣祖) 34년 사마시(司馬試), 동 38년 문과급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외직으로 군읍(郡邑)을 맡으면서도 조금도 어긋나는 일이 없었고 치적(治績)이 제일이었다.

 

함평현감으로 계실 때 선정(善政)하여 현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는데 임기가 끝나게 되자 이를 안 현민들이 미곡 300석을 비변사(備邊司)에 바치면서까지 공의 계속 유임을 청원하자 조정(朝廷)에서는 이를 허락하였으나 공은 도리어 이를 부끄럽게 여기고 고사(固辭)했음에도 결국 유임케되어 3년 후 전임(轉任)될 때에는 현민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워 거기에 무자 3년(戊子 3年) 유애천추(遺愛千秋)라 새겼다한다.

 

정묘호란(丁卯胡亂)때 인조(仁祖)를 강화(江華)로 호종(扈從)하였고 화약(和約)이 성립된 뒤 원창령(原昌令) 구(玖)를 왕자로 가장시켜 신사(信使)로 심양(瀋陽)에 보내게 될 때 부사(副使)로 가셨는데 이를 눈치챈 청장(淸將)을 기개로 꺾어 유명하셨고 부사 인선 때도 세 번이나 사람을 바꾸면서까지 신중한 인선 끝에 공으로 결정했다고한다.

 

국서(國書)를 받들고 평산(平山)에 이르렀을 때 호장(胡將)이 국서의 연호(年號)를 고칠 것을 강요하면서 만일 그렇지 않을 때는 무력(武力)을 행사할 양으로 위협하였으나 공은 “왕명으로 온 사람이 어찌 국서를 임의로 고칠 수 있느냐”하면서 그런 일은 죽어도 따를 수 없다고 태연히 여러 날을 버티고 움직이지 않으니 할 수 없이 호장(胡將)이 강화까지 와서 일을 마치고 돌아왔다는 것이다.

 

심양(瀋陽)에 당도하자 청주(淸州)가 병마(兵馬)를 거느리고 성(城)밖까지 맞았으나 그 때 설석배례(設席拜禮)하는 것이 소국(小國)의 예인데도 불구하고 공께서는 꼿꼿이 선채 배례조차 안하니 제호(諸胡)가 노하여 칼로 위협까지하니 청주가 말하기를 “사신(使臣)이란 이래야한다”. 야외(野外)이기 때문에 자리를 마련하지 않은 것이 아니냐하니 비로소 설석 배례했다고 한다. 주체성(主體性)이 강한 외교로 처음은 주위의 원망도 샀으나 나름대로의 외교 수완으로 돌아오실 때는 수백명의 이곳 포로들을 송환하는데 성공했고 또한 성대한 주연(酒宴)까지 베풀어 송별까지 해주었다한다. 포로 중 해주(海州)에 사는 김굉인(金宏寅) 형제는 그 후 등과하여 높은 벼슬에 있으면서도 공의 기일(忌日)에는 꼭 제사를 모셨다고 한다. 벼슬은 우부승지(右副承旨)까지 오르셨다.

 

공은 평생 동안 교유(交遊)를 좋아하지 않고 성세(聲勢) 있는 자에게 붙어서 이름을 얻는 일을 하지 않았다. 충신(忠信) 독실(篤實)하여 수식(修飾)해서 명예(名譽)를 구하지 않았다. 벼슬에 있으면서 청렴(淸廉) 검약(儉約)하였고 자기 단속은 준승(準繩)에 어긋나지 않았다. 여러 번 고을을 맡았으나 한 뙈기의 전원(田園)도 장만하지 않았으며, 관직을 그만둔 날에는 이웃의 힘을 기다려 밥을 지었다. 인조(仁祖) 때 조정 의논이 공을 염근(廉謹)으로 선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