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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世 이덕회(李德恢)

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경렬(景烈). 아버지는 첨정(僉正) 극(克)이다. 20세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전관으로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扈從)하였고, 호종 도중 급할 때마다 정탐 등으로 시위(侍衛)에 만전을 다함으로써 성상(聖上)의 신임을 받았고 특진까지 하였다.

 

선조 26년 홍양통판(洪陽通判)이 되자 군기의 정비와 훈련으로 기강을 확립하여 관민의 존경과 신임을 사셨다.

 

선조 30년(1597) 정유(丁酉) 남원부판관(南原府判官)으로 부임하자 왜군(倭軍) 56,000의 침공으로 남원성(南原城)이 포위되었고 산성별장(山城別將 : 申浩)도 철수하여 성안에 들어왔으므로 자연산성 무고(武庫)도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 명(明)의 부총병(副摠兵) 양원(楊元)이 이복남(李福男) 병사에게 “산성무고에 방화하여 적이 쓰지 못하도록 할 자는 없는냐”고 물으니 병사는 서슴없이 공을 말했다. 중책을 맡은 공은 그날 밤으로 포위를 뚫고 성을 나가 방화하고 더욱 적병마저 다수 죽이고 전원 무사히 돌아오니 양원이하 성중의 모든 이가 공의 용감무쌍함에 감탄했다한다.

 

적정이 급하여 양원이 성을 버리고 도망하려하자 공은 분연(忿然)히 장중(帳中)에 뛰어들어가 “천명(天命)을 받고 소방(小邦)을 구하러 온 몸으로 위급(危急)을 보고 도망가 홀로 살겠다는 것이 옳은 일이냐”고 공박했으나 불과 4,000의 소수 병력으로 적의 파상공격(波狀攻擊)을 버티었음에도 끝내 4일만에 성은 함락되고 양원은 도망갔으나 공은 접반사(接伴使) 정기원(鄭期遠), 병사(兵使) 이복남(李福男), 부사(府使) 임현, 방어사(防禦使) 김경로(金敬老) 등 50여 명과 함께 장렬히 전사하였다.  

그 공으로 병조참의가 증직되고 남원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