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없음

 

26世 이교악(李喬岳)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백첨(伯瞻), 호는 석음와(惜陰窩).

영인(榮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익(士益)이고, 아버지는 후망(後望)이며, 어머니는 송담조(宋覃祚)의 딸이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과 동향으로 일찍이 우암께서 공의 자품(資品)을 사랑하시고 자손들과 같이 가숙(家塾)에서 배우게 하셨다. 오랫동안 문하에서 보고 배워 성취한 것이 많으셨고 숙종 22년 사마시에 급제하고 순안현령이 되셨으며 동 31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하시고 지평으로 계실 때 숙종께서 전위(傳位)의 교가 계시어 등대간쟁(登對諫諍) 하실 때에 음성이 매우 크다보니 성상께서 “저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시니 좌우(左右)에서 “교악입니다”하고 말했다고 한다. 드디어 하교(下敎)를 거두게 하시니 공의 힘이 컸다 한다.

 

동 37년에는 이방언(李邦彦)과 함께 최석정(崔錫鼎)을 공척(攻斥)하여 관작을 삭탈케하고 그의 저서‘예기류편’을 불사르게 했다. 유생(儒生) 곽경두(郭敬斗)가 최석정의 유배를 상소하자 왕의 진노(震怒)를 사 홍우선, 이택 등과 이를 옹호하셨다가 안주(安州)로 유배되시기도 했고 그 후 정언, 황해감사, 충주목사, 수원부사를 역임하시고 청(淸)나라에 동지부사로 다녀와서 다시 대사간 승지가 된 얼마 후 소론(小論)의 윤증(尹拯) 일당이 노론(老論)을 탄압하고 우암이 서원제향(書院祭享)에서 축출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통변(通辯)하였으나 도리어 화(禍)를 당하여 경산(慶山), 동래(東萊) 등지로 유배되셨다.

 

그 후 풀려나와 영조(英祖) 원년 승지의 때이다. 정유(鄭楺)가 토역(討逆)의 소(疏)를 올렸는데 성상의 진노(震怒)가 매우 커 정유를 면박하시면서 책상머리의 기물을 깬다, 상소문을 내던지신다하니 좌우에 시립(侍立)한 조신(朝臣)들도 모두 떨고 얼굴빛이 없었으나 公만은 태연하여 안색하나 변하지 않고 손수 상소문을 주워 올리면서 간절한 간(諫)을 거듭하여 드디어 성상을 감오(感悟)케 하였다한다.

 

그 후 동지의금(同知義禁) 한성부 우윤(右尹) 도승지 대사간 형·예조참판 대사헌 등을 지내시고 동 3년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소론(小論)이 재기용되자 삭출(削黜)되어 고향에 내려와 계시다가 동 4년 소론파인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나자 울분 심화 끝에 66세로 하세하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