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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世 이세재(李世載)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지숙(持叔). 사경(士慶)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후지(後地)이고, 아버지는 나주목사 하악(河岳)이며, 어머니는 북청이씨(北靑李氏) 중로(重老)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영특(英特)하셨으며 크면서 더욱 준수(俊秀)하시었다. 때때로 과거에 응시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다가 25세에 비로소 사마시에 급제하시고 숙종 20년 49세에 알성문과에 급제하시었다. 언론(言論)이 바르고 곧았으나 반면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는 성격탓으로 이를 시기하여 옥당에 드는 것을 시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외직으로 나가 동래부사로 명성(名聲)을 떨쳐 후일 감사 승진때는 조정에서 누구 하나 이의(異議)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동래부사에 이어 경상감사 동 27년 평안감사, 동 29년 한성부우윤, 대사간, 도승지, 경기감사, 형조참판 등을 지내셨다.

 

동래부사 때 원래 동래(東萊)는 왜관(倭館)이 있는 문호(門戶)로 벼슬치고는 매우 어려운 곳으로 정평(定評)이 나있었다. 공은 부임하자 곧 약조(約條)와 방침을 밝히고 상인들의 갖은 농간(弄奸)을 단속하고 부조리를 과감히 척결(剔抉)하여 그토록 오만했던 왜인(倭人)들조차 이에 감응(感應)하여 동래부 백년래(百年來) 제1인자로 손꼽히었다. 방백(方伯)을 맡으면서 가는 곳마다 민폐를 척결하고 재정(財政)을 절용(節用)하며 시비(是非)가 분명했고 전부(田簿)에 숨겨진 재산들을 찾아 만(萬)여석의 곡식을 얻게 되었고 그 외 산성수축(山城修築), 병기 정비 등으로 유사(有事)에 대비하였고 산같이 쌓인 공문도 속결(速決)하여 늦는 폐단이 없어 명령 지시는 물론 금율(禁律)조차 잘 지켜졌다한다.

 

경상감사로 있을 때는 국조 이래 으뜸으로 여겨졌던 구봉서(具鳳瑞)보다 낫다고까지 칭송을 받으셨고 가는 곳마다 그 같은 평을 받으셨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이 일국의 재신(才臣)이라고까지 말했고 대임을 맡을 역량있는 인물로는 우선 공을 꼽았다한다. 숙종 32년 조정에서 병조판서로 임명하려 하였으나 갑자기 59세로 하세하셨다.

 

< 監司公 초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