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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世 이숭호(李崇祜)

조선 후기의 문신, 성리학자. 자는 덕이(德而). 시호는 효간(孝簡).

세정(世貞)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의규(宜揆)이고, 아버지는 통정대부덕산현감 보흥(普興)이며, 어머니는 안동김씨 성유(聖游)의 딸이다.

 

성품이 매우 침착, 치밀하고 풍채(風采)도 준수(俊秀)하였으며 키도 크셨다. 어려서부터 총명, 호학하시어 널리 경사(經史)에 통달하시고 특히 병려문(輧儷文)에 능하시어 약관에 이미 세상일에 밝으셨고 행세하는 유학자가 되셨다.

 

영조 37년(1761)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이듬해 세자시강원설서에 초임되었다. 예문관봉교로 있으면서 무단 결근으로 한 때 경양도찰방(景陽道察訪)으로 좌천되었으나 그 후 정언(正言), 비변사랑관(備邊司郞官)으로 재직 중 또 다시 영남의 창곡관리부실(倉穀管理不實)로 유배되셨다. 이어 여러 벼슬을 거쳐 동 49년 대사간, 승지에 오르시고 정조 4년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청(淸)나라에 다녀온 뒤 다시 대사간 동 6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재차 청나라에 가셨고 다음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 대사헌, 병조참판에 오르셨고 동 11년 예조판서,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등을 거쳐 함경도 감사를 끝으로 벼슬을 떠나셨다.

 

좌찬성(左贊成)이 증직(贈職)되시니 효간(孝簡)의 시호가 내리셨다. 항상 말씀하시기를 “선비는 첫째 몸가짐이 깨끗하고 지조가 있어야하며 문예(文藝)는 그 다음이라”고 하셨다.

 

경직(京職)에 계실 때는 경연(經筵)에 많이 나가셨는데 강론(講論)이 매우 밝고 유창하여 성상의 칭찬이 많으셨고 고을을 맡으셔서도 항상 겸손하고 실천, 궁행하여 치적이 많으셨다. 공사간 모임이 있을 때는 항상 뒷전에 앉아 말이 없으시므로 아는 이가 적었고 평소 조용하고 과묵하시다가도 권도(權道)를 팔거나 또는 권도에 있는 사람이 횡포(橫暴)할 때는 단호히 응징(膺懲)하시었다. 워낙 명리(名利)를 멀리하였기 때문에 공의 마음을 일반은 헤아리기 어려웠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