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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世 이재학(李在學)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성중(聖仲), 호는 지포(芝圃). 시호는 익헌(翼獻). 의규(宜揆)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보흥(普興)이고, 아버지는 예조판서 숭호(崇祜)이며, 어머니는 안동김씨 협(浹)의 딸이다.

 

영조 46년 정시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정조 4년 대사간과 그 후 이조판서만 빼고 예판 등 5판을 두루 지내셨다.

 

전라감사에 오르시고 동 17년 동지 겸 사은부사(冬至兼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오신 후 대사헌에 오르시고 동 19년 형조판서 의옥사건(疑獄事件)을 잘 다스려 명형관(名刑官)으로 유명하셨다.

 

척신(戚臣) 김귀주(金龜柱)의 역모를 탄핵하여 유배시키고 정조가 승하하자 산릉도감당상(山陵都監堂上)으로 계셨는데 순조(純祖)가 유충(幼沖)해서 정순대비(貞純大妃)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는 것을 기화로 공사 지연 등을 이유 삼아 나주(羅州)에 위리안치된 벽파(僻派) 김귀주일당인 채지영(蔡趾永)의 충동으로 소론(疏論)케 되어 가산(嘉山)에 유배되셨으나 계속 그 일당은 김한기(金漢耆)의 유소(遺疏) 운운으로 모함하여 결국 영상(領相) 심환(沈奐)의 청국(請鞫)까지 이르렀으나 대비(大妃)께서 믿지않으시므로 온성(穩城) 이배(移配)로 그쳤고 그 후 순조 5년에 풀려나셨으나 그 이듬 해 돌아가시었다.

 

성품이 매우 총명하고 풍채도 단아 수려하시었으나 이마에 기골(奇骨)이 있으셨다한다. 화려하거나 놀이를 좋아하시지 않으시고 오로지 책상과 기국(棋局)만을 벗삼으셨다. 모든 일에 이해(利害)가 빠르고 손익(損益)에 어긋남이 없어 이름이 났었고, 특히 형관(刑官)으로 이름을 떨쳐 오랫동안 그 직책에 계셨는데 한번 보면 그 진위(眞僞)를 잘 판단하시어 누구도 억울하다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고한다.

 

부인은 동래정씨(東萊鄭氏) 동현(東鉉)의 따님이시며 아드님 규현(奎鉉)을 낳으셨다.

 

< 翼獻公 초상 >